왕검 조선의 계보, 단군 조선(고조선,

▣단군조선의 통치체계

현재 논의되는 상황을 보면 단군조선은 다양한 거수국(제후국, 지역국, 후국)을 거느린 다부족, 다종족, 다민족, 다국가연합체로 볼 수 있다.

21세기인 오늘날 비슷한 형태를 보면 가톨릭 교황체계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대단군이 정신문화를 지배하는 형태가 된다.

단군 왕검의 통치는 신정일치체제에서 정신문화의 지배가 핵심적이었다고 판단된다.

왕검 조선의 계보, 단군 조선(고조선, 1

실제의 단군 왕검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견해가 있다.

고깔모자를 쓰고 하늘과 소통하는 실질적인 모습으로 초상화를 그려야 한다는 정형진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소도문화를 생각하면 화해와 치유의 무당속의 신앙에 맞추어 남북통일시대 민족의 정신적 통합을 준비하고 대비하는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 ………………………………………………………………………………………………………………………………………………………………………………………………………………………………….

● 조선 단군의 계보(47대, 재위연수: 2,096년)

(가)송화강아사달시대:삼한초대단군왕검~21대소대단군(B.C. 2333~1286:1048년간)[제1왕조]

1대 왕검단군(93, B.C. 2333) 삼국유사 ‘고조선(왕검조선)’의 기록을 보면 이주해 온 환웅이 토착민인 곰족 여인과 결혼해 태어난 혼혈이라 할 수 있다.

북방 반농경 반유목민족 배달민족은 개방성이 특징인 민족이었다.

한민족 고유의 사상으로 유불선을 포괄하고 보다 근본적인 사상인 풍류 정신의 기원이 배달 조선의 통치이념인 홍익인간, 재세화, 접화군생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왕검 조선의 계보, 단군 조선(고조선, 2

불단군의 상상도 불단군의 흔적은 불단지, 사업주가리 문화로 남아 있다.

삼성기, 태백일사 등의 기록을 보면 불단군은 국제적인 인물로 보인다.

또한 지혜로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단군 왕검의 치세에 대한 업적보다 불단군의 치세가 아마도 단군조선의 토대를 마련해 준 것이 아닐까 싶다.

2대 부여 단군(58B.C. 2240태자)의 단군 왕검의 아들은 4명으로 알려져 있다.

‘부’, ‘부소’, ‘소(‘, ‘여’로 기록되어 있다.

불태자는 중국 중국 9년 홍수 때 오행치수법을 우왕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불태자의 지나 방문 기록은 지나(중국) 사서의 기록에 많이 남아 있다.

또한 넷째 아들 부여는 무공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단군조선이 멋을 부릴 때 대부여로 국호를 바꾸었을 때 부여왕자의 무훈정신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의지로 평가하는 설도 있다.

(※「시나」라고 불린 나라가 중국이 되었다.

이름 짓기의 중요성을 느끼게 한다.

)

왕검 조선의 계보, 단군 조선(고조선, 3

서양의 문화가 동양을 완전히 무너뜨렸고 동양인, 특히 유라시아 북방민족은 자신들의 고유사상의 위대함을 완전히 망각했다.

삼신사상, 칠성사상, 정화수지성, 모든 생명존중, 자연과 조화를 이룬 삶의 고귀한 정신을 잃어버렸다.

이제 서양 과학기술을 극복하면서 서양 사고의 해악도 깨달았다.

홍익인간, 재세이화, 접화군생의 가치가 서서히 복원되고 있다.

3대 가륵의 단군(45, B.C.2182, 세자) [※재위 6년 갑진(단기 157, 기원전 2177년), 단군이 열양욕살[삭정]을 약수지방에 유배시켜 종신토록 감옥에 가두었다.

후에 용서하고 그 땅에 봉하니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4대 오사구단군(38, B.C.2137, 태자) 5대 구을단군(16, B.C. 2099, 양가) [※ 현재 북한 평양시 강동군 대백산 자락 단군묘의 진실은 무엇인가? 북한은 인골 연대 측정에서 단군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역사문헌 기록은 있는가? 조선왕조신록 신동국여지승람은 단군묘라고 쓰고 있다.

또 다른 기록인 「단군세기」에 의하면, 「기원전 2092년 7월, 구을단군이 남쪽으로 순수해지자 풍류강을 건너 송양에 이르러 병을 얻어 대박산에 묻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헌과 유물로 단군릉이 어울릴 가능성이 매우 높음]

왕검 조선의 계보, 단군 조선(고조선, 4

(북)조선은 초대 단군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 민족사학계는 5대구를 단군묘라고 부르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사실 단군묘라는 점은 모두 인정된다.

무슨 단군묘인지 여기 차이가 있다 한심한 것은 한국의 강담 주류사학자들이다.

이들은 단군묘가 가짜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대북 연구가 미덥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6대 달문단군(36, B.C.2083, 우가 7대 한율단군(54, B.C.2047, 양가) 8대 우서한단군(8, B.C.1993,?) 9대 아술단군(35, B.C.1985, 태자) 10대 황을 단군(59

13대 비달단군(61, B.C.1782, 우가) [※기원전 1733년, 보신 50년 새벽 하늘에 오성이 즐비했다는 오성취루]의 기록이 있다.

나대일 박창범 서울대 젊은 천문학자의 이 천문학자에 대한 과학 증명은 한국 고대사 인식을 획기적으로 전환시킨 일대 사건이 됐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천문기록 연구는 한민족의 상고사 인식에 새로운 상상력과 기존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새로운 연구의 기폭제가 되었다.

더 한층 연구가 필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식민사학과 반도사학의 극복은 이미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국가 차원의 인정 수용이 아직 너무 미흡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왕검 조선의 계보, 단군 조선(고조선, 5

실제 기록은 기원전 1733년으로 1년 정도 차이가 난다.

수천 년 계속된 기록으로 1년 정도의 차이는 진위 판정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한다.

천문학자의 대다수는 1년 차이는 문제없다고 말한다.

북방 유목민족에게 천문은 너무나 중요하다.

길 안내하는 길안내가 천문이니까………………………………………………..

14대 고불단군, 60, .C.1721, 우가15대음단군, 51, B.C.1661, ?16대위나단군, 58, B.C.1610, 우가17대여울단군, C을단군, 68, B.C.1552, 태자18대동엄단군, 49, B.1

21대 소태단군(52·B.C.1337·세자) : [소태다!
소태!
소태처럼 쓴다는 말은 소태 단군이 우현왕 색불루의 정변, 쿠데타로 단군의 자리에서 쫓겨난 역사적 사건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럴싸한 얘기다.

왕검 조선의 계보, 단군 조선(고조선, 6

고깔을 썼는데 너무 유교적 복식으로 보인다 실제 남북통일시대에 대비해 민족의 원류인 단군의 복원이 필요하다.

민족공동체의 원류 단군에서 정신문화적 통합의 기틀을 닦아야 한다.

정신문화 통일이 실질적인 남북통일이 아닐까?

(나) 백악산 아사달(장춘)시대 : 삼조선 22세 삭불루~43세 물리 (B.C.1285~426:860년간) [제2왕조]

22대 삭불루단군(48B.C.1285욕살고등 아들로 우현왕을 거쳐 단군으로 즉위).[한국 민족 최초의 쿠데타라고 할 수 있다.

무력을 통한 권력이양을 뜻한다.

실제 상황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8조 금법을 반포하고 법에 의한 통치를 강화한 것을 보면 실제로 단군조선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는 점과 여러 유목민족의 발전으로 갈등이 고조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삼한시대에 대단군에게만 주어졌던 병권이 삼조선시대에 이르면 부단군, 지역 단군에게도 조금씩 생겨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23대 아홀단군(76, B.C.1237, 태자) 24대 연나단군(11, B.C.1161, 태자) 25대 설나단군(88, B.C.1150, 태자) 26대 추로단군(65, B.C.1062, 태자) 27대 두밀단군, 단군(288) 25대 설나단군, B.9, 20대 설나단군, 단군, B.9, 단군 798, 단군 798, B.9, 단군 798, 단군, 단군, 단군 79)

왕검 조선의 계보, 단군 조선(고조선, 7

동북아 지중해를 감안할 때 지금 표시된 단군조선의 영역은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비파형 청동검, 고인돌, 적석총이 표지유물이다.

(다) 장당경아사달(개원, 개원)시대 : 대부여 44세 구물~47세 고열가(B.C.425~B.C.238:188년간) [제3왕조]

44대 구물단군(20.C.425,욕) : 나라 이름을 빌려주고 다시 삼한의 부활을 꿈꾼다). 시대 변화로 정신문화 지배는 약화됐고 무력 힘에 의한 통치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거수국(제후국, 후국)의 독립이 급격히 강화되었다.

지역의 후국, 제후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병권이 나온 시대라고 할 수 있다.

45대 요르단군(55, B.C.396, 세자) 46대 보울단군(46, B.C.341, 세자) ● 47대 고열가단군(58, B.C.295, 대장군) 계해 58년(B.C.238) 단군 조선을 폐관하고 이후 6년간 오가들이 함께 다스린다.

이후 기원전 239년에 건국된 ‘북부여’로 이어진다.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한다.

기원전 232년 단군 조선을 계승하고 해모수가 단군의 지위에 올랐다.

[단군조선 – 북부여 – 고구려]에서 국통이 계속된다

왕검 조선의 계보, 단군 조선(고조선, 8

귀국, 배달, 조선, 북부여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국통맥을 확인한다.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보태왕릉비 기록에 나타난 ‘출자북 부여’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국통 연결의 핵심이 해모수의 북부여이다 ………………………………

● 공인노무사 고현권 (02 – 2235 – 3441) ● ……………..